[김형원의 오덕이야기] ⑱빚 갚다가 '에반게리온' 등 SF명작 탄생시킨 '가이낙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 / 2018.05.05 06:00:00
'나디아', '왕립우주군', '톱을 노려라!', '에반게리온', '마호로매틱' 등 작품은 평소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이름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마니아 사이에서 '명작'이라 칭송받는 이 작품을 만든 곳은 놀랍게도 일본의 콘텐츠 전문 기업 '가이낙스(GAINAX)' 한 곳이다.

1984년 설립된 가이낙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선보인 후 대중에게 친숙한 회사로 자리 잡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기말적 분위기와 거대생체병기에 탈 수밖에 없었던 소년소녀의 이야기, 정체불명의 적 '사도'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 인간의 정신 내면세계를 파고드는 암울한 내용 구성 등 참신함으로 당시 대중을 열광하게 만든 작품이다. 에반게리온의 등장이 슈퍼로봇 등 어린이 시청자 중심의 애니메이션 문화를 성인으로 확대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애니메이션 창작 집단 가이낙스를 만든 인물은 일본 현지서 오덕의 왕 '오타킹'이라 불리던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다.

오사카에서 SF 전문점 '제네럴 프로덕트'를 운영하고 당시 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애니메이션 창작 집단 다이콘 필름(Daicon Film)에서 활동하던 오카다는 1987년 공개된 극장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王立宇宙軍 オネアミスの翼)' 제작을 위해 가이낙스를 설립했다.

일본 모형잡지 모델그래픽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장난감 전문 기업이던 반다이(Bandai)가 영상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바로 '왕립우주군'과 가이낙스의 오카다 때문이다. 오카다는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의 파일럿 필름과 기획서 및 영상 사업 계획서 등의 자료로 반다이 이사회를 설득했다.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극장판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는 1950년대 지구를 닮은 가공의 혹성 오네아미스왕국을 무대로 왕국 첫 우주비행사에 지원한 주인공 시로츠구가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유인 우주로켓에 몸을 싣는다는 내용을 그렸다.

◆ 회사 빚을 갚다가 명작을 탄생시킨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는 본래 왕립우주군 제작 후 해체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오카다를 필두로 가이낙스 주요 제작진이 예정보다 더 많은 비용을 애니메이션 제작에 써 버리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게 됐다.

가이낙스가 빚을 갚기 위해 만든 두 번째 애니메이션은 SF명작으로 손 꼽히는 '톱을 노려라!(トップをねらえ!)'다.

▲톱을 노려라!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에반게리온을 탄생시킨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의 첫 감독 작품이기도 한 '톱을 노려라!'에는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캐릭터 디자이너로 참여했던 미키모토 하루히코(美樹本晴彦)가 참여했다. 그는 미소녀 캐릭터와 SF로봇을 결합한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했다.

1988년 등장한 '톱을 노려라!'는 영상미와 드라마성을 중시했던 1980년대 오리지널비디오애니메이션(OVA) 콘텐츠의 금자탑이라 평가 받았으며, 1990년 우수 SF작품에 대해 상을 주는 일본 SF어워드 성운상(星雲賞)에서 미디어부문 수상작에 이름을 올렸다.

SF 로봇 애니메이션 '톱을 노려라!'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본래 목적인 회사 빚을 갚는데는 실패한다. 이유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또 다시 예상보다 높은 비용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가이낙스는 회사 빚을 갚기 위해 애니메이션 '모데나의 검', 게임 '사일런트 메비우스' 등을 만들게 된다. 1997년 출간된 서적 '오타쿠 아미고스'에 따르면 이 시기 오카다는 창조적인 콘텐츠 보다 대중에게 잘 팔리는 콘텐츠 제작에 몰두했다.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갈무리

1990년 가이낙스는 TV용 SF 애니메이션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를 대중에게 공개한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나디아는 일본 현지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의 인기작 1위에 오를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안노 감독이 만든 나디아 제작에는 현재 국내 '프리파라'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유명한 동우A&E(당시 세영동화)도 참여한 바 있다.

애니메이션은 서커스 단원으로 성장한 소녀 나디아가 사실은 네오 아틀란티스 왕국의 왕녀이며, 수중 전투만 벌일 것 같았던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우주선으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결말을 예측하기 힘든 스토리와 SF 마니아가 흥분할만한 내용 구성으로 주목받았다.

나디아는 프랑스 SF 소설가 쥘 베른(Jules Gabriel Verne)작 '해저2만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와 '신비의 섬(L'Île mystérieuse)'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캐릭터 디자인은 훗날 에반게리온 등장인물을 그린 사다모토 요시유키(貞本義行)가 맡았다.

가이낙스는 1995년 회사의 운명을 바꾼 글로벌 메가 히트작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을 탄생시킨다.

▲에반게리온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갈무리

안노 감독의 에반게리온은 세기말적인 배경 속에 정체불명의 적 '사도'와 맞서 싸우는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에는 안노 감독이 지브리 애니메이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도 등장시킨 바 있는 로봇을 닮은 거대 생체병기 '에반게리온'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계가 아닌 생체병기 에반게리온은 전기 케이블을 등에 꽂아 움직이며, 파일럿의 생각을 에반게리온에 싱크로 시키는 등 참신한 묘사와 등장인물 대부분이 사망하는 암울한 내용,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연출로 어린이가 아닌 성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본 정부(문화청)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을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에 선정하는 등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했다.

▲에반게리온 초호기. / 아마존재팬 갈무리

안노 감독은 2006년 가이낙스를 그만두고 애니메이션 제작사 '카라'(χαρα·그리스어로 '환희'를 뜻한다)를 설립한다. 안노는 자신의 회사에서 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제작한다. 2007년 공개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는 아직도 그 결말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가이낙스는 1998년 안노 감독작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彼氏彼女の事情)', 2001년 야마가 히로유키(山賀博之) 감독의 미소녀 SF작 '마호로매틱', 2005년 사에키 쇼지(佐伯昭志) 감독의 미소녀 개그 애니메이션 '이것이(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これが私の御主人様), 2007년 슈퍼로봇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天元突破グレンラガン)' 등을 선보였다.

▲마호로매틱. / 유튜브 갈무리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최신작은 스바루 자동차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던 2015년작 '방과후의 플레이아데스(放課後のプレアデス)'다. 미소녀 캐릭터와 SF를 결합한 이 작품은 스바루 홍보용으로 기획됐지만 실제 내용은 자동차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고, 애니메이션 마니아 사이서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 게임 제작사로도 유명했던 가이낙스

가이낙스는 대중들에게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기억되지만 '전뇌학원(電脳学園)'과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를 탄생시키는 등 1980~1990년대 게임 제작사로도 유명했다.

1989년 등장한 '전뇌학원'은 가이낙스가 극장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을 만들 때 생긴 회사 빚을 갚기 위해 기획됐다.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으로 제작된 이 게임은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에서 얻은 당시로써는 높은 수준의 그래픽으로 인기를 얻었다.

전뇌학원을 만들었던 아카이 타카미(赤井孝美)는 미소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원조이자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프린세스 메이커'를 탄생시킨다.

▲프린세스 메이커2 리파인 게임 화면. / 야후재팬 갈무리

마왕으로부터 왕국을 구한 용자가 전쟁고아가 된 소녀를 딸로 맞아들여 공부와 교양, 무사수행 등의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딸을 키워 가는 이 게임은 글로벌 메가 히트작으로 떠 오른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는 1991년 PC(PC-9801)용 플로피디스크 게임으로 출발해, 시리즈 최고 인기작인 1993년작 '프린세스 메이커2'를 거쳐, 2007년 '프린세스 메이커5'까지 다수의 작품이 등장했다.

프린세스 메이커는 게임을 소재로 한 2002년작 TV애니메이션 '쁘띠프리 유시(ぷちぷり ユーシィ)'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국내 게임 제작사 엠게임은 프린세스 메이커를 소재로 모바일 게임을 제작해 서비스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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